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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장애인운동의 전개과정②푸른잔디회와 후츄료육센터 투쟁운동
일본장애인운동의 전개과정②
푸른잔디회와 후츄료육센터 투쟁운동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08-02-06 16:52:35

일본의 장애인운동을 이론화 시킨 다떼이와 신야(立岩真也、릿츠메이칸 대학원교수)는 자립생활운동의 시작을 70년대로 보며, 우리나라에 영향을 준 자립생활운동은 미국식자립생활운동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다나까 고이찌로우(田中耕一郎、오사카부립 대학원교수)는 80년대 이후 일본의 자립생활운동은 새로운 가치형성이 아니라 가치의 재발견이라고 평가한다.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며 일본 자립생활운동의 시작이라고 하는 푸른잔디회의 운동과 후츄료육센터 투쟁운동에 대해서 정리하도록 하겠다.

2.일본장애인운동의 전개과정②-푸른잔디회와 후츄료육센터 투쟁운동

푸른잔디회(青い芝の会)의 운동

푸른잔디회는 1957년 40명의 회원이 친목단체를 목적으로 설립했다. 3년 후엔 240명으로 회원이 증가 하였으며 권리를 옹호하는 조직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직접적인 운동으로는 이여지지 않고 조직의 회계 관리를 문제로 사무국의 혼란과 운동의 방향성을 둘러싸고도 69년부터 72년까지는 갈등이 계속되어진다.

한편 64년에 승려인 오사라기아끼라(大仏公)는 아마라바촌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집을 뇌성마비장애인에게 제공한다. 이른바 장애인 공동체였다. 그곳에서 오사라기는 장애인들에게 장애인인 자신에 대한 자각과 생산성을 중요시하는 사회에 자신이 맞추려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강연을 하게 되었고 몇몇 장애인들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 후 69년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서 아마라바촌은 붕괴하고, 그곳에서 나온 사람들이 가나가와(神奈川)지역에 돌아와 기존의 푸른잔디회 멤버와 합류하게 된다.

그 후 이들의 운동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요코하마(横浜)에서 발생하게 된다. 바로 2세가 되는 장애아동을 엄마가 키우기 힘들다는 이유로 살해하게 되는 사건이었다. 사건 후 가나가와(神奈川)현 심신장애아부모의 모임은 장애아동을 키우는 부모의 힘겨움을 주장하며 살해한 아동의 엄마에 대한 감형탄원운동을 전개하게 되는데 이에 대항하여 푸른잔디회의 저항운동이 시작된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장애아 살해사건은 자주 일어났으며 그 이유를 시설의 부족으로 판단하여 60년대 장애인수용시설이 많이 생기게 되는데 일조를 하게 된다.

이 사건을 푸른잔디회는 장애인자신들에 대한 '존재부정'으로 받아들였으며 이것은 73년 5월 장애가 있는 태아는 낙태를 허용한다는 우생보호법개정안에 대한 반대운동과 연결되어 전국으로 확대되어 갔다. 73년 10월에는 제1회 전국대표자대회가 개최되어 전국조직으로 탄생되었다. 그 영향으로 우생보호법개정이 연기되었다. 그 후에는 양수검사 등 장애인의 생명을 부정하는 다양한 움직임에 반대운동을 전개하며 특수학교의무화 반대 등 규탄대회가 계속적으로 열리게 되었다.

푸른잔디회의 기본적인 운동의 특징은 시설의 부정과 가족의존에 대한 부정이었다. 또한 자신들의 목소리로 긍정의 존재로서의 입장을 명확히 했으며 동시에 가정이나 시설로부터 자립을 하게 된다. 이때 본인들의 생활을 지원해준 비장애인 자원봉사자들이 활동보조인으로 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활동보조인과의 마찰은 계속 일어나게 되고 이로 인해 그들 나름대로 활동보조인에 대해 정의를 하게 된다. 활동보조인은 활동보조를 행하는 공간에서는 장애인의 손과 발의 존재(수족론)이여야 하며 사회의 차별과 싸울 줄 아는 동지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츄료육(府中療育)센터의 투쟁

한편 1970년 가을, 동경도 후추료육센에서 장애인시설의 비인간적인 시설환경을 고발하는 저항운동이 시작된다. 이 센터는 동경도에서 68년 4월에 동양 제일이라고 자랑하는 400명수용의 [초근대적]시설로 설립된다. 이 투쟁은 동경 도청 앞에서 천막농성을 실시하였으며 3년에 걸친 협상 끝에 해결을 하게 된다.

이 때 투쟁에 참여했던 장애인들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한 그룹은 시설내의 투쟁을 목표로 한다. 시설내의 처우개선을 계속하면서 시설 내에서 발언권을 확보하고 당사자모임을 만들어 목소리를 냈다.

다른 한 그룹은 시설자체를 부정하는 그룹이었다. 그들은 생활의 중심을 시설이 아닌 지역으로 옮겼으며, 지역에서 생활할 수 있는 생활조건을 요구하게 된다. 중요하게 다루어 진 것이 바로 활동보조비 요구 운동이었다.

그 결과 74년에는 중증뇌성마비장애인에게 개호인을 파견하는 사업이 실시되고 75년에는 생활보호대상자에 한해서 파견시간이 확대되었으며 활동보조서비스의 시간 증가를 위한 운동은 80년 중반의 자립생활운동과 일부 합류하면서 88년 전국공적개호보장요구자조합을 결성하면서 발전하게 된다.

후추투쟁의 결과 일부의 장애인들이 지역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탈 시설화의 움직임은 주요도시를 통해 확대되어 갔다. 또한 이미 지역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푸른잔디회의 멤버들과 맥락을 같이 해 가면서 자립생활에 필요한 자원(활동보조비, 소득보장)을 공적 부조를 통해 지원해야 한다는 운동을 전개 해 갔다.

특히 소득보장운동은 생활보조비와의 구별을 요구한다. 생활보조비를 요구 할 때 마다 굴욕적인 모멸감이 느껴본 장애인들은 생활보호비가 아닌 연금을 통한 소득보장운동을 전개 하게 된다.

확실히 푸른잔디회의 운동과 후츄료육센터의 투쟁은 70년대 장애인들의 자립생활운동이었다. 시설과 가족의 보호를 부정하며 지역에서의 삶을 전개 했던 그들은 자립생활의 기본이 되는 활동보조와 소득보장운동, 그리고 사회참가를 위한 교통(엘리베이터설치운동)과 건물(복지마을 만들기 운동)의 접근권 운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시기나 내용면에서 전혀 뒤지지 않을 만큼 운동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영국의 장애학이나 미국의 자립생활이념처럼 이론이 발달하지 못했을까? 이유는 너무 간단했다. 일본 교육의 장애인에 대한 배타성과 폐쇄성으로 인해 장애인 당사자의 학자가 양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장애인운동을 새롭게 평가하면서 이론화 했던 사람은 자립생활센터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던 다떼이와 신야 교수였으며 그 후 80년대에 활동보조인으로 활동했던 대학생들과 당사자들이 10년 후 20년 후 연구자가 되어 일본의 장애인운동에 대해 다양한 접근하면서 이론적으로도 성장을 하였다.

주) 이 내용은 다떼이와 신야(릿츠메이칸 대학원)교수의 저서인 생의 기법을 참고 정리하였다.

정희경소속 릿츠메이칸(立命館)대학원 첨단종합학술연구과 http://www.arsvi.com/





칼럼니스트 정희경 (badasori9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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